나의 바람끼
“썩을 노옴....나이가 삼십이 다 돼서 방구석에서 뭐하는 겨어? 그러니 어떤 가시나들이 좋아 하겄어...”
“어머니 그런 말 마세요. 그래도 동네 언니들이나 아줌마들이 삼촌보고 일등 신랑감이라고 칭찬을 많이 해요. 남편감으론 일등이고 연애 상대는 별로래요. 호호호....아직 우리 삼춘이 연애상대로 더 멋진 걸 몰라요...”
“내 아들이지만 참 멋대가리 없어. 지형처럼 술이나 먹구 가끔 말썽을 피운다 던지 동생같이 말이나 좀 허구 성격이나 활달하던지...”
“호호호... 제가 그이의 허풍에 넘어가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 아가씨 보면 제가 삼촌 잘 잡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삼대가 함께 살던 총각 때, 어머니와 형수가 방에 처박혀 있는 나를 두고 하시던 내용이다.
그랬다.
나는 나이가 삼십이 다 되도록 누구들처럼 뜨거운 연애도 못해보고 학교나 집, 아니면 직장이나 집밖에 모르던 우물 속 개구리 같은 존재였다.
위의 대화에 등장한 아가씨는 내게 적극적으로 접근했지만 나의 성격이나 아니면 남녀 간의 지켜야할 선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던 나의 소극적인 가치관 등등을 이유로 나중에는 버림을 받았다.
물론 버림을 받았을 때는 아쉽기도 하고 미련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내게도 더 멋진 사랑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책과 글을 좋아하던 친구들과 여수 돌산대교에서 밤새도록 동동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창 선운사 산길을 걸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그런 사랑은 잊을 수 있었다.
“오빤? 여자 관심 없어? 친구들 다 장가가서 애들 낳고 사는 것 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아? 오빠…….내 친구 중에 오빠 생각하는 친구 있거든 AA 알지.한번 만나 볼래?”
“AA? 맞다. 그 애 오빠하구 잘 맞을 거 같애. 싹싹하고....”
두 여동생이 삼십이 넘도록 장가갈 생각을 안 하는 오빠가 답답했었나 보다. 이젠 친구들 까지 동원하고 아니면 지네가 먼저 가고 싶은데 똥차(?)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얌마, 니꺼 읽어봤는데. 너무 진부한 얘기 아니니? 사랑이야기로 나갈 거면 좀 더 극적이어야 되지 않어? 이루어 질 수 없는 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걸 이겨나가는 것. 아니면 좀 더 위험한 불륜이나 뭐 그런 거 말이냐. 자식... 사랑도 안 해본 놈이 사랑을 소재로 쓴다고...”
친구에게 교정을 봐달라고 했었는데 교정은커녕 설교만 온종일 듣고 말았다. 아마도 경험 없이 휘갈기는 글에 과연 생명력이 있을까 하는 그런 충고일 것이다.
“니 미스 리 좋아한다고 했잔어?? 근데 데이트 신청 온 걸 왜 싫다고 하냐?”
“자식아. 니가 사랑을 아냐? 가끔은 튕겨야... 사랑은 더 찐해지는 거야... 깊어지고”
훤칠한 키에 멋지게 생긴 입사 동료는 사내에서 여직원 사이에 인기가 짱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미스 리를 좋아한다고 이미 오래 전 내게 말했었다. 그러면서도 더욱 사랑이 깊어지기 위해선 관리를 해야 한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내게, 어머니와 형수 여동생들. 그리고 친구나 동료의 말은 충격을 주었다.
‘그건 그래. 해 본적도 없구... 알지도 모르면서 그걸 이야기로 만들면... 당연히.....’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들은 내게 많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리고 친구들도 나의 미래의 길을 무조건 인정했었다.
나는 교만(驕慢)과 착각 속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나는 더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를 다닌 2년의 배움은 결코 도움이 되질 않았던 거 같다.
당시 배웠던 이론은, 뛰어난 어휘나 문장을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그 건 죽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히 학교를 때려치우고 나는 출판사를 택했고 여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랑에 대하여 누군가 물어오면 답하기를 주저한다.
그렇다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길가는 여인네들을 잡고 ‘우리 사랑해 볼래?’ 를 할 순 없지 않은 가.
선배와의 대화다.
“사랑? 어떤 사랑? 사랑의 종륜 엄청 많지? 어느 방향??”
“글쎄요... 아마도 남녀 간의 사랑이....”
“그래?...음... 내가 보기엔 자네는 웬만하면 스토르지(Storge)를 선택해봐라..”
“스토르지 사랑요? 별루 못 들어 본 건데요?...”
“하하하.....자네도 에로스(Eros)나 아가페(Agape)적인 사랑에 물들어 있구만...하지만 스토르지적 사랑이..어쩌면 우리네 인생에 가장 적합하다고 나는 보네...”
“죄송하지만..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좀 낯설기도 하고....”
“그러지....우리가 익히 보고 듣는 건 대체적으로 에로스야...즉 육체적인 사랑이라고도 말하지. 남녀가 오로지 상대의 몸을 탐닉하는...
또 플라토닉(platonic)이 기본 흐름인....아가페적 사랑도 아름답지만 그건 한쪽의 희생이 강요되지.... 하지만 말이야 스토르지 사랑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토르지 사랑은.... 사랑의 주 테마인 불타는 정열이 없어...”
나는 그 한마디에 실망을 먼저 느꼈다. 사랑에 정열이 없다면?.....
“왜에 실망???”
“글쎄요....사랑에 정열적인 감정이 빠진다면... 그 효과가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하하... 자네도 대중 속 화려함을 꿈꾸는구먼... 로맨스 말야... 작가나 사랑에 빠진 남녀나 로맨스를 추구하면 불을 보듯 뻔하지... 그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에 촛불이구... 그래서 로맨스가 극적 인거야. 자네 로맨스를 써 보게? 그 다음 로맨스가 써질 거 같은가?”
어려운 이야기를 연거푸 뱉는 선배는 나 자신을 시험하려 드는 것 같았다.
“스토르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정열적인 감정이나 서로의 육체도 탐닉을 하지 않아. 다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정이나 따스함을 느끼네. 어쩌면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에 흔히 볼 수 있어.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정인지 자신들도 구별 못할 때가 많어. 하지만 위기 같은 것도 별로 없고 비교적 사랑의 지속력이 매우 길어...”
“오히려 우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그리 볼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분명히 틀리네.... 일단 우정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해야 스토르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리송한 나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남녀가 만나서 진행되는 절차를 말해 보게... 서로 사랑을 확인해 가는 순서 말야...”
“네에? 그거야....”
“하하하, 인사 트고....서서히 알아간다는 핑계로 커피 잔 기울이고 술 마시고...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 타서 남자가 슬그머니 여자 손잡고...이러쿵 저러쿵 해서 잠자고..그러다 결혼도 하구 아니면 중간에 이별도 하고......”
나는 다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연구하는 유명한 작가의 말에 낭만적인 사랑을 논한 게 있지...음... ‘친밀함과 열정이 결합된 사랑을 낭만적 사랑이라 합니다. 서로를 좋아하고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장래에 대한 확신은 없는 상태로 서로를 좋아해서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경우 다른 요인에 의해서 이별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이상적인 사랑이 바로 이 낭만적인 사랑일 것입니다.’라는....”
“낭만적인 사랑????”
나는 그 당시 뛰는 심장의 박동을 주체 할 수 없었다.
“그럼 스토르지 사랑이란 게 낭만적인 사랑을 말하는 건가요?”
“아!! 아니지? 사랑을 논 할 때 가장 위험한 발상이 바로 그거네. 사랑은 복잡 미묘한 것이어서 ‘A는 B다’는 논리로는 답을 할 수 가 없어... 서로 물리고 물리는 거야. 이해하겠나? 물론 학자나 작가들도 사랑의 정의나 나눔의 경계선이 다 틀려. 그저 보편적인 구분만 있을 뿐이야.”
“너무 어렵고 범위가 너무 넓어요, 저처럼 짧은 석두로는 이해하기가 힘들 구요....”
“그래... 자넨 솔직하구먼.... 그래서 사랑을 해보지 않고 사랑을 논하다 보면 정리가 안 되는 거라네... 일단 어떤 사랑이든지 해봐야 그 사랑을 말할 자격을 가질 수 있지...”
“치이... 그럼 전 뭐예요?.....”
“너무 기죽진 말게... 간접 경험도 경험이니... 그것부터 시작해 봐. 또한 로맨스나 아가페보다는 문학성이나 남의 흥미는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스토르지적 낭만적인 사랑, 낭만적인 스토르지를 찾아보게....”
“그럼 방법 좀 알려 주실래요??”
“방법?? 이 친구 웃기는 구만... 방법까지?”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는 그 이상 말씀이 없었다.
다만 몇 년이 지난 나중에야 나는 스스로 작은 정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삼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은 그래선지 내게 많은 도움을 준다.
길가에 가는 여인네의 발을 걸어 넘어트려서 따귀 맞을 위험도 없고.
술집이나 창녀촌을 들락거리며 여인네들을 알기 위함으로 돈을 들일 필요도 없고.
어쩌면 부부간에 있을법한 공허한 관계를 잊고 새로운 이성으로 하여금 뛰는 심장을 느껴 볼 수 있으며
안 해 본 사랑의 종류를 돌아보며 만끽할 수도 있다.
나는, 우연한 사랑을 말하는 루두스(Ludus)적 사랑이든, 현실적인 사랑을 일컫는 프라그마(Pragma)적 사랑이든, 미칠 듯 한 사랑을 표하는 매니아(Mania)적 사랑이든, 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에로스나 아가페적 사랑이든 모든 걸 만끽하고 싶다.
그런 나의 바람끼가 언제나 사그라들지 모르겠지만.....
(백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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