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신앙인의 눈높이 2.
요즘 내겐 두 가지 화두가 머리에서 빙빙 돈다. 하나는, 평소 궁금해 하던 외형적인 교회와 교회 안에서 교우 사이가 갈라지는 이유와 성도로서 중요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십일조 문제가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교회 내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이 글은 어렵고도 복잡한 주제를 현재 나의 신앙의 기준으로 기술했으니 혹여 이 글을 읽는 수많은 목회자들이나 믿음과 순종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공부 시간에 대형 교회 조직이 갈라지는 이유를 간략하게 듣게 되었지만 한 쪽의 입장만을 고수한 그 내용으로는 나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물론 그 주제를 토론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했으나 예상(?)대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공부를 진행하는 분은 아마도 갈라진 그 이유나 원인은, 신앙생활에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거나 일반 신앙인은 구태여 알아 둘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자들 중에 전문적인 신앙공부를 많이 한 수많은 목회자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어서 웃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재의 신앙생활을 수많은 종교 중 하나의 형태로만 이해하고 있을 때 과연 어느 종교가 내게 가장 합당할까를 두고 마지막까지 ××와 교회를 저울질 했다.
예배의 형식이 상대적으로 경건한 ××는 여러 면에서 내 입맛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작은 공간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는 모양새나 예배 후의 세상 공동체와 다를 게 없는 자유분방함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중앙집권적인 운영형태는 등을 돌리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거 같다.
반면 교회는 모든 면에서 민주적이며 자율적이고 양대 기둥이 적절히 동역하고 선한 경계를 하면서 공동체를 움직여 나가는 모습이 좋았다. 어릴 때 다녔던 학교 분위기의 연장선이라 적응하기도 좋았고 일단 나 자신을 감동시켰던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과 목표를 갖고 그 길을 가는 게 좋았다.
그런 긍정적인 내용으로 내가 선택(?)한 듯 했던 외형적 교회생활도 진행 중에 차츰 눈에 보이는 것. 즉 아무리 인간적인 친분이 있더라도 영적인 분위기가 다르거나 나만의 영적인 문제로 교인 간의 반목과 분란, 갈라짐 등은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저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관계로 기술 내용에 따라 오해 받을 소지도 있으나 그 이유를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갈라진 동기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으며 단편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1800년대 후반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전해진 ××교(이 글에선 ××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생략하기로 한다.)와 개신교. 개신교 즉 기독교의 뚜렷한 갈라짐은 해방 전후라고 보인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면서 그 전엔 하나로 움직이며 부흥하던 교회는 일제의 우상에게 고개를 숙인 전과를 두고 서로 반목하게 된다. 그로 인해 가장 보수적인 흐름을 고수한 K가 갈라지고 이 후에는 대형 신학교가 사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해 갈라지면서 상대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또 다른 K도 다른 길을 찾는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인 거 같다. 교회의 가장 대표 격이던 모 회가 어떤 단체의 가입을 두고 옳으니 틀리니 가입을 하자니 안하자니 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면서 T와 H로 이름을 달리한다.(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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