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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잡문

하지 말아야 할 말

by 백대현 2015. 7. 30.

 하지 말아야 할 말



년 전 어느 날,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를 생각하고 나서 그 방향을 잡은 후 ○집사에게 그 일을 함께 하자고 했다.

그 집사에게 특별한 목표나 목적을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사소한 것부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성도와 전도 대상자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차츰 외형이 갖추어지자 발대식과 경기를 치르면서 우린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재미와 은혜를 나누었다.

비록 나보단 연배는 낮았지만 나는 그를 누가 뭐라 하던 나의 감독이자 팀의 감독으로 의지하였고 그도 사적으로는 내게 형이라는 말 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던 그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따로 만나 서너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전에도 여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몇 년을 서로 의지한 입장에선 당시 그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를 만나고 그도 나를 찾아온다. 그는 전과 다르게 얼굴이 봄에 활짝 핀 개나리처럼 광채가 난다. 하는 일도 잘 풀리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자신의 삶을 주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변한 이유를 내게 설명해 주었다.

“집사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분에게 그때 못한 것이 가장 아쉽고 또 미안해요. 이제는 제가 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제 대신 집사님이라도 그것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나는 주님이 주신 그 날의 말씀으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묵상과 대화와 글쓰기를 통해 그 의미를 하나씩 깨닫고 또 지인들을 통해 배워나가고 있다.
그럴 찰나에 그가 던진 한 가지 숙제로 인해 그 참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가 그 말을 던지고 돌아간 후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 한 말이라 그냥 무시해 버리기가 미안했고 실제로 감동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각기 다른 이유로 등을 보이고 돌아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하나같이 아쉽고 안타깝다. 물론 나는 그들이 말했던 내용을 거의 잊지 않고 나의 머리와 가슴에 담고 있다.

이 글은 그가 말했던 내용에 대한 나의 답이며 이 답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자 아쉽고 안타깝다고 말한 내 자신에게 스스로 말하고 대답하는 내용이므로 혹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절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

지금으로부터 이년 전,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사랑의 40일이라는 공부를 통해 ‘사랑’ 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공부가 ‘사랑’ 에 대한 내가 평소 가진 마인드와 많은 부분에서 부합된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충실하려고 노력했었다.

그 공부 내용 중, 중요하게 각인된 게 몇 가지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비결’ 이란 것이다.

저자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내가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말하기 전에 그 시간과 내용과 방법을 잘 계획해야만 서로 간 진실한 사랑을 교류 할 수 있고 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 의미를 전부터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관계에서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작게는 가족부터 벗, 이웃, 거래처 등 살면서 관계되어지는 모든 인간 사이에서 필요한 거라는 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범위를 좁혀 사랑하는 사이로만 국한하여 이야기하면 쉽게 풀어 갈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관계 중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려 얘기해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는 ‘믿음’ 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단다. 우리가 입술을 통해 사랑을 말할 때 그 안에 믿음이 담겨져 있으면 진실한 사랑이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말로 풀이하면 된다.

위에서 말했던 그는 자신이 밝아진 이유 중 첫 번째로 서로 간 ‘솔직한 대화’ 를 통해 찾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솔직한 대화란, 아마도 내가 위치한 자리와 처한 환경 등을 고려하며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는 결론을 가정할 수 있다.

그는 평소 내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솔직한 대화를 통해 자신이 변했듯 전에 거처했던 곳에서는 솔직한 대화를 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등을 돌렸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집사님,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자신도 인간이니까 힘들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고 소리치고 싶을 때나 화날 때가 있지 않을 까요. 근데 그것을 상대편에게 보이지 않으면 상대는 그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을 까요. 그런 상태로 무심히 지내다 보니 서로 모르는 데서 오해도 생기고 시기와 질투도 생기고...”

물론 그가 했던 말을 내가 약간 각색해서 쓴 것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는 충분히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나는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한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지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나를 포함한 직분 후보자 두 명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를 찾아가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대화의 속성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솔직한 대화를 벗어나게 하는 요소인 거짓이나 아첨 등’ 을 별로 하지 못하는 자로서 비판하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교인들이 들었다면 뒷말이 나 올 법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목사님을 평소 존경하고 저에게 주님을 알 게 해주신 바에는 항상 감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허나 앞으로 어떤 관계로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목사와 성도의 신분을 떠나 바깥에서 만난다면 서로 불편한 점이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직분은 목사의 부족한 부분이나 빈 곳을 채우는 게 본분이라면 그 본분을 채우기 위해 저만의 고집을 피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저의 위치가 목사님의 지근거리에서 보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걸 조용히 넘어가고 있다지만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직분이 그것을 하는 게 주님의 뜻이라면... ”

사랑의 40일이란 책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는 그 저자는 모든 기준을 주님의 말씀을 전제 하에 문장을 이어갔다.
주님을 믿는 자들도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거짓과 아첨이 담기면 그 지속성이 짧다는 것을 얘기했고 신앙인의 범주 안에서 예스와 노를 철저히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위의 말을 한 것은, 나름대로 저자가 쓴 글 내용을 받아들인 결과다. 서로 믿는 사이에는 정직한 마음이 담긴 대화는 아주 중요하다.

예전에 나의 다른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대화 즉 우리가 표현하는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나의 생각을 통해 조율되어져서 밖으로 표현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자신의 표현력이 부족하여 마음에 있는 말이 잘못 전달되어지는 경우도 있는 데 그 이유가 어찌됐든 정직함이 그 속에 있다면 시간이 문제이지 진실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어있다.

사람들 관계에서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을 가지고 막연한 사귐을 가지면 그 관계는 금방 갈라진다. 특히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도 간에는 목표와 목적은 하나이지만 진행 방향이 다른 데서 서로 간 진실한 대화가 없으면 함께 할 땐 그나마 좋은 관계로 보이지만 조금만 방향이 달라지면 참으로 놀라울 정도의 반응으로 변할 수 있다.

한 예로, 잠시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 있어서 고심을 하던 모 성도와 새벽녘까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십여 년을 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서로 간 너무도 몰랐던 사실에 그나 나나 너무 놀라 반성하고 회개했다.

우리는 우리 각자를 주님이 똑 같이 사랑해 주시고 또 똑같이 사랑을 행할 사명을 가진 자들로서 각자의 분주한 삶으로 인해 서로의 삶을 무시하고 방관했던 것을 나누면서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 후 그 성도는 다시 교회를 잘 나오고 있다.

또 하나의 예로, 자신이 하는 일을 최고로 생각하고 실제 밤새워 공부했던 그 성도는 어느 날 풀죽은 상태로 나를 찾아 왔다.

대략 그 이유를 설명해 보면, 어느 날 자기가 하는 일을 두고 모 교우가 이래라 저래라 했다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만큼은 자긍심을 갖고 살았던 그 성도는 그 말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약간의 불쾌함을 가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편을 들었다.

“당신은 그래도 참을성이 있다. 나 같았으면 그의 면전에서 불쾌함을 표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행할 바를 행하고...”

물론 내가 두 성도 간에 있었던 내용을 옆에서 듣지 못했기 때문에 누가 옳다 틀리다를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다만 사람들은 자기만의 자랑(pride)을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할 때 크던 작던 상처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수 있다.

두 가지의 예를 보면서 하나는 함께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의사소통 부재에서 오는 것과 또 하나는 적절치 못했던 표현으로 인해 서로 간에 오해와 불신과 상처 등을 통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이자 주제어인 ‘하지 말아야 할 말’ 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어설픈 관계에서 어설픈 위로나 질책은 관계를 힘들게 하고 오랜 시간을 설령 함께 했더라도 서로의 믿음과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내가 교회의 어떤 자리에 있든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솔직한 대화의 역기능을 찾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무시하기로 하고 그보다는 대화의 시간과 내용과 방법을 거듭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인관관계에서는 대화는 필수고 싫든 좋든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수단이므로 우리는 함께 섬기는 교회 내에서도 그 수단을 통해 아직도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해야 할 의무가 있고 함께 하는 성도와는 교회에 제대로 정착할 동안에 보살 필 또 다른 의무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바로 그런 마인드를 갖춘 성도가 많은 교회가 발전하고 부흥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한 주간을 세상에서 보내고 단 하루 주일을 교회 공동체 생활하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말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성도 간의 제대로 하는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면 그 일이 긍정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선지 교회 내에서는 중간에 있는 성도들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중간에 위치한 이들의 방관과 주저함으로 서두에 등장시킨 그와 과거에는 형, 동생하면서도 지금은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나 함께 할 때는 주님의 주신 사랑과 봉사를 제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신앙관으로 걸음을 바꾼 모습 뒤에는 서로가 언제 은혜의 시간을 가졌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서로가 등을 진다. 모두가 참으로 진정 주님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교회 공동체는 믿는 자들이 믿음의 강도와 관계없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다. 믿는 자들은 자기만의 가지각색의 영적인 문제와 비밀을 안고 또 주님을 통해 그것을 깨우치면서 때로는 주님이 주신 시험과 연단을 거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 중에 필연적인 관계로 엮이는 성도 간의 관계는 말 그대로 주님을 어느 정도 알기 전까지 시험을 거치는 과정이다.

우리를 살리신 주님은 모든 것을 직접 행할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이 서로 협력하여 이루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보이지 않은 것을 믿는 우리가 뭔가가 자신의 눈에 보여야만 믿는 불신자들에게 행하길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과 마음을 살필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 위치가 어디에 있든 그 기준과 큰 줄기는 같다. 허나 교회를 리드하는 사람들 즉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위에서 말했던 믿음이나 또는 인간의 그릇 크기에서 약간의 우열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거나 근본적으로 성격이 강한 사람들 등 일부의 교인들 중에는 그 작은 우열을 들먹이며 예배드리는 장소를 옮기는 데 일반 초신자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내 자신 안에서 또는 내 삶의 곤고함과 피로함에서 오는 것을 그 방향을 교묘하게 다른 데로 돌림으로서 자신에게 타당성을 부여하는 게 그것이다.

중반부 내용 중 말이 마음에서 나오듯 내 마음 상태를 말로 표현하면서 탓을 엉뚱한 데로 돌리며 나는 옳고 상대가 틀리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한 번 뱉은 말은 돌고 돌아 더 정확한 명분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꽁꽁 둘러진 그 말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마음에 박히면서 교회 안에서 주님이 원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는 게 그런데서 나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하지 말아야 할 말’ 은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고 말은 하되 가려서 하란 말이다. 특히 위에서 말했던 교회 내의 신앙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강한 우에 속하는 성도들 즉 중직 자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주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바는 성경에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실천을 온전하게 행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가려서 하라는 말 중에 하나로 ‘나는 하는 데 너는 왜 하지 않니?’ 이다. 신앙을 어설프게 잘못 배운 사람들이 주로 많이 하는 말이다.

나는 예배도 헌금도 교회의 모든 공동체 부분에서 열심히 하는 데 너는 왜 잠자고 있냐는 투로 옳은 말 같지만 틀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즉 정신이나 정서적으로 제대로 서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다보면 피로해 진다. 그 피로가 반복되면 우리의 마음은 어둡게 되고 다른 빛을 찾으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 다음은 ‘자기가 언제부터 교회 일에 동참했다고... 말이 많아...’ 이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지금 내 곁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 확신을 갖기까지 십여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동안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은 이 글의 첫 줄에 기술한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다.
그 일을 하고자 하면 일단은 교회의 분위기를 봐야 하고 중직들에게 건의도 해야 하며 준비된 계획안과 실천 사항 등을 표현해야 한다.

표현은 주로 말을 통해 보이는 것이니 내가 말을 할 때 주위의 다른 성도가 ‘자기가 언제부터 교회 일에 동참했다고... 말이 많아...’ 로 반응이 나왔다면 아직 성령으로 온 몸과 맘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에너지가 오히려 달아날 것이다.

내 자신을 놓고 볼 때, 그 힘을 채우기 위해 십여 년이 걸렸다면 달아나는 것은 일초의 시간도 필요치 않을 만큼 쏜살같이 달아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몇 번의 기회를 볼 수도 있다지만 대체로 꺾인 나무가 새로 일어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아예 뿌리박을 곳을 새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내가 속한 조직과 모임에 이런 저런 건의나 제안을 많이 한다는 것은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이 없는 자는 처음부터 말할 생각도 없고 할 말도 없다.

조직과 모임에 관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사랑의 표현이다. 좀 더 일찍 행해야 할 자가 비록 조금 늦게 왔더라도 그것을 박수로 응원해 주고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면 사랑을 받는 그 자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더 좋은 걸 내놓게 됨으로써 그 조직과 모임이 발전하는 모양새가 나온다는 것이다.

얼굴이 개나리꽃처럼 밝았던 ○집사는 그 상태인 것이다. 비록 모든 면에서 부족한 자신이지만 서로 간 정직한 서로의 상태를 대화를 통해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나누면서 내 안에 쌓였던 영적인 문제가 하나씩 들춰지고 사라지면서 입술 뿐 아니라 얼굴에서도 빛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내게 그것을 바라는 거였고 그것만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길임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나는 그로 인해 받은 감동을 이 글로 표현하면서 우리 모두 ‘하지 말아야 할 말’ 은 스스로 저 구렁텅이에 던져 버리고 꼭 해야 할 말만을 가려 해서 내가 섬기는 교회가 발전 부흥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데 모두가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글 :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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