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선다(四枝選多)
모 친구가 내게, “너는 길가에 핀 잡초와도 대화하니? 그리고 그런 이름 없는 풀에게도 의미를 부여하니?” 하며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미소로 대답한다. 그것은 질문대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소위 잡학 박사라고 자칭 떠벌리기도 했고 글의 수준을 떠나 함께했던 클럽 친구들은 “사랑”에 관해 집중적으로 써가는 나의 글에 투여된 나의 생각과 사상을 두고 상당히 획기적이고 세상 적으로 보면 약간의 황당함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대화에서는 가끔 내 속을 감추기는 하지만 글에서는 절대 거짓을 담지 않는다. 나의 사상이 세상의 진리와 다르다 해도 일단 들춰낸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은 옳고 또는 틀리다는 소리를 듣기를 좋아하며 고쳐나가며 나 자신의 양식으로 삼는다.
그런 내가 요사이는 연재하고 있던 세상적인 글을 중단하고 주로 신앙이 담긴 글을 써보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런 중단과 변화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 예배드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인터넷이나 라디오나 TV등 시간이 허용되는 한 여러 곳에서 먹으려 노력하고 있다.
세상에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정말 많다. 유모가 섞인, 꾸중과 질책, 온유함으로 또는 불처럼 하나님 말씀을 각각의 성격이나 수준으로 전하는 모습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 진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그 많은 목회자들을 보며 목회자들의 단면을 본다. 단면이란 말씀 외에는 다른 건 모른다는 말이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 말씀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들을 보면 말씀에 완전한 순종을 하지 못하는 우리네 같은 부류와는 그 차원이 다를 것이다.
나는 성경을 볼 때 마다 저 성경은 내가 죽는 그 시각까지 다 알지 못할 거라 장담한다. 고로 우리 인간은 목회자든 나 같은 평범한 성도든 그저 주님의 형상을 따라 가고 닮아 가는 현재 진행형일 뿐 완벽함을 이룬 상태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다만 성경을 놓고 많이 읽고 기도하면 타인보다 말씀을 먹은 양만은 다르기에 언행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나는 세상적인 화두를 두고 떠벌이는 나의 생각과 글을 평가 받는 것은 즐겨하나 내 신앙을 높다거나 낮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인간 누구에게도 평가 받는 것은 싫다. 오직 주님 외에는 나의 신앙을 평가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상대 인간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신앙을 두고 인간이 서로 평가할 때 우린 잡음이 일어나고 옳고 그름을 두고 소진 될 동안 그 시간 동안 그 교회의 발전과 부흥과 쇠퇴가 일어날 거로 본다.
즉 서로 간 평가를 즐겨하는 공동체 일수록 그 공동체가 부흥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 적으로 볼 때, 내 사람이 만들어 지는 과정은 여러 가지 요인 중에 두 가지가 주로 쓰인다.
하나는 상대에게 믿음과 신뢰를 가지게 될 때 나는 그를 주군으로 모시고 목숨을 버린다. 또 하나는 나의 끼니를 주는 사람에게 그래서 내 목숨을 구걸한다.
세상에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으나 신앙인 사이에서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아직도 세상적인 생각과 글을 써 보려는 나의 집념이 세상일이든 신앙생활이든 의심하는 것은 다 버릴 수 없음을 안다.
아마도 내 자신이 세상의 평가가 두렵다거나 함께하는 신앙인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어려워했다면 나는 나의 생각과 글을 이렇게 게시판을 통해 세상에 내놓지 않을 것이고 혼자 간직하며 거룩한 척 하며 살 것이다.
허나 내가 아무리 고결한 척 해도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계신다.
나는 내가 믿는 우리의 주님은 우리 인간을 각각대로 만들어 주신 이유가 다 있다고 믿고 있다. 고로 이렇게 움직이는 나의 움직임도 하나님이 이미 계획했던 바라 생각한다.
세상일이든 신앙 안에서든 우리 인간은 실수와 실패의 반복 속에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똑 같은 실수와 실패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우리는 동일한 실수와 실패를 줄여야 한다. 그것이 내 개인의 일이면 내 개인이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조직이나 공동체이면 그 단체가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야지 말씀을 통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개인이든 조직이든 반성해야 할 거리다.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다. 반성하지 않고 서로 간 그 이유를 돌리는 것은 비겁한 행위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어떠한 일을 행할 때 준비가 없으면 그것은 모래성처럼 작은 파도에 밀려간다.
작든 크든 그것을 내 개인 일이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조직의 일이면 서로 간 지혜를 나누어야 한다.
일을 할 때 즉흥적 시작은 내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그 생명이 짧다.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결단력이 있고 치고 빠지는 데 능수능란함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공률이 높지 않다.
나는 내가 맡고 있는 학생들에게 시간이 될 때 마다 강조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정답, 정답 같은 오답, 오답 섞인 정답, 그리고 오답이다.
그 네 가지에 다음을 직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은 정답이다. 그리고 너희 선생이나 부모나 지금 말하고 있는 백대현은 정답 같은 오답이나 오답 같은 정답 즉 정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오답은 아직 안 믿는 자들로 지칭했다.
우리 인간은 정답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기독교인은 정답 같은 오답이나 오답 섞인 정답에서 정답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누가 정답을 찾아가느냐의 싸움이다. 이미 정답은 나와 있지만 우리 인간은 무지하고 우매해서 서로 간 다툼과 시기와 질투 등으로 그 체력을 소진하면서 그 정답을 찾아가는 길이 멀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린 다 인간이기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가 사지선다형 시험 문제에서 정답을 잘 찾아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는 것처럼 우린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잘 적응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답을 이미 알려주신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과정을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였는 데 지금 다른 이유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말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글 : 백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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