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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너와 나의 수다 속에서 2

by 백대현 2015. 7. 28.

너와 나의 수다 속에서 2



사님, 홈피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거 같아요?

에쓰! 정확한 지적!!

???....

맞아요. 신앙생활 즉, 교회에서는 말이 없는 게 좋고 옳다고도 봅니다.

엥? 지금 제가 집사님께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너무 나서지 말라는 말인데요?

응. 알고 있다니까욤. ㅎㅎㅎ

집사님께는 유쾌한 얘기가 아닌데. 기분이 나빠야지 웃는 건 또 뭐래요.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오우,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깎는 얘기면 혈기 높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하하, 나도 변호해 볼까요?

변호요? 또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건가요?

물론이죠.

해보시죠. 어떤 말이든 지요.

인터넷이 무엇입니까? 내 가정부터 세상 온 끝까지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가 발견한 것이죠. 그 누군가는 인간이니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거란 말입니다. 그치요?

아 네. 우리처럼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봐야겠죠.

교회는 의외로 말이 많은 곳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을 삐뚤어진 시각으로 보면 위에서 제가 말한 것처럼 말이 없는 것 보다도 못하겠지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인터넷이란 것을 통해 말 많은 인간들이 더 많은 말을 하라고 하시는 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유요?

네 이유요. 교회는 말이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그건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는 것과 직결되지요. 다만 그 말이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과 중심으로 돌면 하등 문제가 될 게 없는 데 우매한 우리 인간은 모든 걸 자기 얼굴을 위해 말을 하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기준에 두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 이상 성도도 목회자도 교회도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다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과 청년들 그리고 젊은 세대들 모두 예전의 방식으로는 전도하기가 힘들어요. 내 자신의 어릴 적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는 거예요.
성도의 신앙이 더딘 것이나 교회의 부흥이 더디고 정체된 것은 똑 같은 원리이지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을 허용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인터넷을 통해 성도간 교제를 나누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도 변화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발전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인격과 언행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가 힘들고 발전을 못하는 것은 성도 하나 하나가 다른 성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데 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은 분란만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말이라도 사랑의 말로 받는 것이지요. 서로 옳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다른 성도를 믿지 못하니 잘난 내 말이 맞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교만 속에 빠진 꼴이 된 것이지요.
기독교인은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보단 오늘이 오늘 보단 내일이. 바로 그 중심에 하나님 말씀과 성도 간의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으로 교제하고 교제 속에 말씀이 깔리면 나도 발전하고 교회가 발전하는 것이에요.

집사님 말씀대로라면 반대인 경우는 내 자신이 신앙의 발전이 더딘 거나 교회의 부흥도 더디다는 것이네요.

그렇지요. 사람마다 자기의 신앙의 기준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 신앙으로 주일 외의 시간을 이겨내는 것도 사실이지요.
헌데 그게 너무 강해요. 내 신앙이 맞는다는 것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주장으로 다른 성도를 정죄하고 내가 하면 맞고 다른 성도의 말은 틀리다고 하지요. 서로의 주장을 목소리의 톤을 높여 하니 교회가 말이 많은 게 되고 그 와중에 등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서로 말을 안하면 그런 일이 없게 되겠지요. 조용히 자신이 맡은 바만 하면서 그저 조용히...

그건 옳은 것 같지만 틀린 거라고 봐요.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된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인터넷을 통해 그 빈 공간을 채워 나가라는 것이에요.

빈 공간?

네에. 빈 공간... 유교적 동양적 사고가 팽배하게 머리를 채운 나 같은 사람이 변화되려면 채워진 공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됩니다.
공간 속에 말씀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예전의 내 사고가 서서히 밀려나는 것이지요. 밀려나면 밀려날수록 저의 몸과 마음은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간다는 등식이 성립되지요.

집사님의 말씀은 보통 성도들이 자신의 세상적인 생각이 들킬까봐 침묵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네요.

음... 두 가지이겠지요. 하나는 내가 드러날까 봐 나를 감추려는 동작과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겸손한 것.

어떤 게 옳은 걸까요?

둘 다 틀립니다. 감춘다고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나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지요.

에구, 어렵네요.

어렵지 않아요. 그저 세상이 변하는 것처럼 변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느 생활이든 변화가 있어야 해요. 물론 성령을 통해 내 삶의 변화가 필수이겠지요.

그게 쉽겠습니까?

물론 쉽지 않지요. 저는 공자나 맹자나 노자나 중국의 유명한 사람들의 말이 진리라고 배우고 자랐어요. 또 유명한 철학자들이 말한 것이 다 옳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아마도 지금의 우리 목사님도 교사의 생활을 접고 목사로 방향을 바꾼 것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목사님이 그랬다고요?

네 그랬지요. 그 분과 지금의 제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저도 요즘 그것을 너무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요. 세상에는 중국의 그런 사람들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은 참 많지요. 솔직히 말하면 많이 배운 지식인은 차고도 넘치는 데 모두 쓰레기 같은 지식일 뿐이에요. 나 자신의 자아로 하나님의 하나의 참 된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요.
세상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 말씀뿐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의 거울이 되어야하고 그 거울을 보며 우리가 살면되는 것이지요.

그걸 몰라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아닐 거 같은데...

그렇지요. 그래서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육일과 주일 하루 싸움은 신앙이 얕은 사람들에겐 승리하기가 버겁지요. 아마도 그 비율이 다른 목회자들만이 어쩌면 승리할지도 모르는... 그게 안타깝기 때문에 지금의 홈피를 통해 목회자나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거예요.
제발 자신들을 좀 만 낮추어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하는 예수님의 본 모습을 기대하게 하는 분들이 하나씩 나서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집사님이 총대를 멨다는 취지의 말씀이 그거이군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느 새 젊은 성도들이 저를 바라보더군요. 그 젊은 성도의 말을 듣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것이 저를 더욱 반성하게 만들었지요. 아마도 다른 신앙의 선배들도 나처럼 홀로 신앙을 찾아가다가...
신앙은 나이나 연륜이나 직분이 아니란 걸 그들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아마도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그것을 찾아가려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맞습니다. 그것이지요.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 참 뜻을 알고 이런 작은 실천부터 한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목표를 이루게 하실 겁니다.

참! 집사님이 말한 그 분들이 그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분들도 있을 거 같은 데요.

그건 아주 쉽다고 봐요. 그것까지 얘기해주면 그 분들이 싫어 할 수 있어요. 그 정도는 다 아는 분들이란 걸 저는 믿고 있습니다.

글 :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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