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수다 속에서 4
제가 첨에 교회에 왔을 때, 집사님에 대해 듣던 말과 지금을 보면 좀 다른 거 같아요.
헉!! 뭐라고 하던데요? 또 뭐가 다른 데요?
교회 다닌 지 꽤 오래되었는 데.. 뭐라 할까... 너무 응응(?)이 없다고나 할까...
푸하하하,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되긴 했네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집사님 같은 분이 오히려 응응(?)인 거 같아요. 솔직히 함께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지금 제가 이만큼이나 신앙생활하는 것도 집사님 덕분인 거 같습니다.
오잉? 그 말은 제 귀엔 달콤하고 듣기 좋은 말이긴 하나 옳은 말은 아닌 거 같은 데요.
네에?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뭐랄까... 암튼 칭찬은 감사하지만 덕분이란 건 옳은 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유와 약간 거리가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가 뭐라 하던 원칙을 갖고 있는 게 있었어요. 그리고 우선순위도 두었답니다.
원칙이요? 우선순위요? 신앙생활에 그런 단어가 필요 있을 까요?
물론이죠. 원칙과 우선순위는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어째서요? 원칙이나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중심 내 자아같은 그런 거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요? 신앙생활 중에 가장 큰 걸림돌이잖아요?
오우! 그러네요. 신앙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 내 중심과 자아. 아주 멋진 말입니다.
근데 말하는 투는 별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닌 거 같은 데요?
아아, 아닙니다.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 프로 정도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네에?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들이 저를 두고 뭐라고 말했던 저는 솔직히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 외엔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아요. 좀 당돌하게 들릴 수 있지요. 신앙생활은 어느 존재, 즉 사람을 의식하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고 보거든요. 신앙생활은 오직 주님과 내 자신의 문제만 본다는 것이 틀림없는 거 같습니다. 단지 그 때와 지금의 내 신앙생활이 달란 진 건 보는 눈이 좀 더 넓어졌다는 것일 뿐...
넓어졌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좀 전에 말했던 대로, 당시는 주님과 저만의 일대일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다음이 외형적인 교회생활이나 성도 간의 교제 등등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아하, 그런 것을 우선순위라고 말한 거군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근방 말한 넓어졌다는 의미는 그 순서를 알게 되었다는 것 보단 그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이에요. 특히 주님과 내 자신의 사이와 내 자신과 성도 간의 문제 등등은 유기적인 하나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잘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
그건 저도 님을 이해시킬 능력이 없어요. 다만 하나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한 교회를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게요,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조금 궁금하다구요? 그럼 그 건 그냥 넘어갑시다.
에구, 그렇다고 하시던 말을 중단하는 건 좀 그렇지요.
요즘 제가 출근하여 책상에 앉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랄까 아니 관점이랄까 크게 두 가지로 주신 거 같아요. 하나는 나 자신 즉 개인적 신앙과 함께 모여 하는 단체(공동체)적 신앙 이렇게 두 가지요.
쉽게 말하면, 나와 교회에서의 생활을 말하는 거 같군요.
그렇지요. 그 두 가지가 적절하게 혼합되어 굴러가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의 몸이 육신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듯 하나님이 주신 참 영과 우리 자신들이 각기 가진 인간적이 면도 함께 굴러가야 한다고 봐요.
에엣? 그건 좀 그런데요? 교회 생활 아니 신앙생활은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싸움인데 나의 인간적인 면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거 같은데요.
네에, 저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저의 인간적인 세상적인 면을 보이기 싫어서 오래 전엔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했는데... 바로 그 자세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꼴이었죠.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이 의외로 그런 시선을 이유로 교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쩝쩝... 너무 어렵네요.
어려울 건 없어요.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우리가 그 순간 예수님과 같아질 순 없잖아요, 믿는 다고 내 입술로 인정한다해도 우리들 각자의 육신적인 생각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아요. 아무리 공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철야로 새벽으로 기도해도 우린 내 신앙과 인간적인 생각은 여전하다는 것이지요.
우린 비록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만 서로 그런 부분을 인정해야 해요.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헌금을 많이 한다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내가 그렇게 한다고 다른 믿는 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지금이야 누군가가 저에게 그런 말을 직설로 해도 미소로 넘어갈 수 있지만 아마도 당시에 그런 말을 님이 듣지 않고 내 귀에 들렸다면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없을 수 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것이 신앙의 깊이 차이가 아닐 까요? 그런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는 거네요.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신앙의 깊이라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린 하나님 모습 자체예요. 주안에 내가 내가 주안에 라는 액자를 어디선가 들어 본 듯 하죠. 사람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인데 왜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에게 이런 차이를 두셨을까...
집사님, 성경을 너무 깊이 연구하다보면 이단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던데. 집사님은 스스로 깊이 빠져 드는 경향이...
하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눈동자를 키우면 이단은 쉽게 구별되는 거잖아요? 내가 주님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거니까. 이젠 이단 정도는 구별할 정도의 눈은 감히 있다고 봐요. 단지 아직 성경을 다 알 지 못하니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함이나 오버는 있을 수 있겠지요. 저는 하나님을 오직 하나뿐인 창조주이고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한답니다. 단지 하나님 말씀은 아시다시피, 온통 비유의 연속이기 때문에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데서, 내가 받은 은사를 통해 차츰 알아가는 것 뿐입니다. 정확히 알려고 노력하는 것.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더욱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에 자신을 도마 같은 사람과 비유로 해서 말한 거예요?
오호. 그렇게 되네? 잘은 모르겠지만 도마처럼 의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의심을 제대로 긍정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못한 것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은 거 같아요.
좀 엉뚱한 얘기지만 한 교회를 섬기는 것과 여러 교회를 다니는 것의 차이를 무어로 보십니까?
헐~~ 저는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런 것 까지 답하기에는 어렵지요.
에이, 제가 하는 말은 현재의 집사님의 사견을 듣고 싶다는 거지 어딘 가에 있을 교과서 같은 정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질문이지요.
그런가요? 아마도 그 정답은 님 말대로 성경 어딘 가에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을 겁니다. 아무튼 사견이라니...
어느 교회든지 크고 작은 차이가 있겠지만 똑 같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성도 간의 말에서 오는 시험거리를 비롯한 시기나 질투 같은 거. 나는 이만큼 하는 데 저 성도는 나만큼 안한다는,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이것 저것 많이 하는 데 저 성도는 나 보다 잘살고 시간도 많은 데 안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또 목사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거나 내가 속한 기관도 자신의 주장대로 입맛대로 변화시키려 하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옳다는 이유로 강하게 전달하지요.
충분히 나올 만한 화두네요. 그거와 교회를 옮기는 게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그래요. 바로 그것이지요. 충분히 나올 만한 이야기 거리는 맞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 제가 품고 있는 이야깁니다.
넵? 집사님 얘기요? 그렇다면? 그런 거와 집사님이 한 교회를 오래 섬기는 거와 연결이 되지 않는 데요?
네 물론이죠. 저는 위와 같은 생각을 항상하며 교회를 다닌 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저는 원칙과 소신이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 제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거 같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헌데 변화를 스스로 느끼면 말을 하기 시작하죠.
좀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좀...
하하하, 제 자신이 변화가 없을 때, 즉 여기서 변화가 없을 때란 내 안의 진정한 성령이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눈에 의해 밀려서 어떤 자리를 맡게 되면 그런 불만과 불평을 드러내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어찌되겠어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처음에 그 분들을 통해 들었을 때는 집사님에게는 변화나 성령이 움직임이 없었다는 말이네요.
오캐 바리!! 바로 그것이지요.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맡고 있는 분들은 자신의 다급함을 인내 할 줄 알아야 해요. 사실 참 성령은 그것을 잘 안답니다. 자신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해서 헌금을 많이 한다 해서 교회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해서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기 위함이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주님의 몸인데 자신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되면 아무리 신앙이 일천한 사람도 그 정도는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럼 집사님도 당시에 그런 말이 오고가는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눈치까진 그렇고 다행히 제 귀에 직접 들리지 않아서 다행인 거죠. 아마도 당시에 직접 제 귀에 그런 말이 들렸다면 신앙이 지금보다 깊지 않았던 당시의 상태로는... 제 몸은 이 교회에 없을 수도 있겠지요. 얼마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지 새삼 느껴지지요.
집사님, 진짜 교회를 옮기는 교인들의 마음을 간단 명료하게 집사님 생각을 말해 줘 보세요.
그런 말은 제 입술로 직접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봐요. 듣는 사람들 입장에 따라 왜곡해서 들릴 수 있거든요. 다만 안타까운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저와 집사님이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었으면 그런 일은 안 생긴다는 것이지요. 인간들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자리를 고집하다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서로 아껴주고 사랑해 주기에도 짧은 시간인데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알만 한 분들이 그런 일을 반복해서 연출한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지요.
우린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진행 중일 뿐입니다. 나의 형편으로 인해 지극히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데 좀 더 넓은 마음과 양보와 내가 먼저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될 것을...
이해가 되나요? 나 자신의 신앙을 성경을 일 프로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스스로 정확히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한편으론 공동체적 신앙, 즉 교회 생활을 통해 다른 성도를 통해 도전과 결단을 하게 되고 그런 것들을 통해 내가 가진 내 자아를 스스로 벗어던지면서 주님의 형상과 가까워진다는 거...
조금 이해가 될라고 하네요.
신앙생활은 내가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말씀을 통해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해 차츰 변화를 가지면 되는 것이라고 봐요. 어제까지 가졌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내 중심과 자아를 조금씩 내려놓고 예수님이 그 짧은 시간에 우리 인간에게 보였던 행적, 즉 티끌하나 죄가 없었던 예수님이 온통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무엇을 보이셨는지... 하나님은 성경 대부분을 예수님의 행적과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비유를 통해 메시지를 주셨지요. 님과 기회가 있으면 그 비유에 대해 얘기해 봤으면 좋겠어요.
글 :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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