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사랑 e.
저 남자는 그녀를 어릴 적부터 사랑했었나 보다. 허나 그녀는 다른 사람을 더 연모해서 남자는 가슴이 시렸지만 포기하기가 더욱 힘들었기에 주위에서 맴돌며 그녀를 한없이 바라보기만 한 거 같다.
누군가가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행복해 지는 것을 바라는 게 사랑이다.’ 라고 말했다.
고로 남자는 사랑의 정의 중 하나를 지킨 듯하다. 비록 자신도 한없이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이에게 그녀를 보내고 그녀가 가진 불행 요소를 해결해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일 게다.
남자가 핸들을 놓았다. 그녀를 두고 죽음을 선택했다.
왜 저 남자는 가질 수도 없는 사랑을 위해 처음부터 그 길을 나선 것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사랑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저 고목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죽은 고목이 될 수는 없기에 인간은 알면서도 기꺼이 행한다. 그건 사랑이 인간의 삶과 동행하기 때문이라고 이미 말한 데서 답은 나와 있다.
이야기 방향을 현실로 틀어보자.
위에서 예를 든 드라마 속의 남자의 입장은, 현실 뿐 아니라 사이버 세상에서 활동하는, 우리들에게도 충분히 개연 될 수 있다.
즉, 가질 수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사랑이 나 자신에게도 직접 닥쳐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선택하고 행하는 건 순전히 나 자신만의 선택권이고 결과도 나의 몫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이 ‘사랑은 온통 부자유투성이 이고 거대한 모순 덩어리이자 속박 당하는 만큼 기쁨을 얻는 유쾌한 자학’ 이라는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알면서도 스스로 사랑에 속박 당하려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라면,
희망 없는 사랑도 사랑이다. 결과에 겁이 나서 중간에 포기하는 것 보단 저 남자처럼 장렬하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안 해보고 가는 것 보단 해보고 가라는 메시지를 준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위 주장이 어설프게 보일 수도 있고 사이코적인 논리라고 질책을 받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도 인간이라면 두 번은 야단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자신도 자신의 가슴 한쪽에서 그런 사랑이 꿈틀거릴 수 있음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일단 사랑은 해봐야 그 맛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칼릴 지브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면, 사랑하는 감정은 누가 민다거나 아니면 하고 싶다거나 싫다거나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오는 것이고 나도 모르게 멀어져 가는 인간 삶의 한 귀퉁이 이기 때문이다.
죽어 가는 저 남자의 얼굴을 보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을...
비록 내가 소유하지 못했던 사랑이지만 희망이 없었던 사랑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했던 것이다. 죽어가면서 짓는 저 남자의 미소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백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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