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을 마칠 즈음
‘당신의 말이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서 그로 인해 가정이나 일터의 분위기가 더욱 좋아지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어디서 본 듯한 문장이지요? ‘사랑으로 가꾸는 삶’ 337페이지 하단에 있는 글입니다. 워낙 주옥(珠玉)같은 문장이 많은 책이라 일일이 쓸 수 없어서 제 자신이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으로 고른 문장 중에 문장입니다.
책을 겨우 한 번만 읽고 소감을 쓰기에는 조금 성급한 면이 있지만 이 글을 통해 함께 공부했던 여러분도 자신들만의 최고의 문장이나 느낀 점을 하나씩 게시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성급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씁니다.
표지 디자인과 제목만으로도 한 눈에 저를 매료시킨 일금 일만 삼천 원짜리 책은 여태 사서 읽었던 그 어느 책과 비교할 수 없는 금은보화 같은 책이었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기도문까지 제 마음을 감동시키고 또한 새로운 결단과 변화까지 준 이 책의 주제는 신앙생활 하는 우리네뿐만 아니라 현재 동시대에 함께 하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될 수 있는 아니 해당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말씀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
사랑을 우리나라의 어원에서 살펴보면, ‘생각할 사(思)에 헤아릴 량(量)’ 즉 ‘사량’ 이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학설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것은 주어가 잠재(潛在)되어 있습니다. 즉 나를 주어로 보기에는 문장이 어색하니 너나 상대 이인칭으로 보는 것이 매끄럽습니다.
어원대로 해석하면, 사랑은 상대를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뜻으로 나보단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보면 무방하다는 것이지요.
우린 이 책에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가페(agape)적 사랑을 말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분명히 아가페적 사랑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까지도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의 몸으로 온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를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시는 희생적인 예수님의 모습. 상상만 해도 그 사랑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과연 인간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의 저자는 우리 인간은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랑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외에는 할 수 없다고 어느 페이지를 통해 말합니다.
내가 완전하지 못하고 너도 완전하지 못하니 우리는 완전한 예수님을 통해 그것을 배우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만이 그분에게 힘을 얻어 서로 사랑할 것을 이어서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저는 십여 년을 사랑에 관한 글을 폼을 잡아 가며 다양하게 써왔고 또 관련된 책도 읽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좀 더 나은 학설을 찾아보았지만 항상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6주 만에 확실한 정답을 찾은 것 같아 지난 시간에 대한 아까움과 허무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정답을 찾기 위한 그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 같아 한편으론 너무나 기쁩니다.
제가 기쁜 이유는 이 글의 저자는 지금 이 순간, 황금률이란 단어를 통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펼치신 사랑을 적용해 나가면된다는 식으로 자신감을 줍니다. 오늘 이 순간 적용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공간이 교회 홈페이지이니 이 글의 서두 문장에 가정이나 일터에 교회를 적용해 읽어 보세요. 그럼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말이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서 그로 인해 교회의 분위기가 더욱 좋아지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여기서 당신의 말은 이 글의 저자가 가르친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할 경우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배웠던 사랑이 담긴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이지요.
나와 너 우리 간에 대화는 살면서 필수 중에 필수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말할 시간과 내용과 방법을 계획하여 타이밍이 적당할 때 입술을 움직여 나갈 것을 이 글의 저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 제가 알고 있었던 사랑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사랑의 차이를 배워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사랑의 그 실천 방안으로 대화의 중요성을 짐작하여 성도 간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시리즈로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저의 짐작은 많이 맞아 떨어져서 대화의 중요성이 이 책에선 자주 등장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예를 들면, 비판받기 싫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나 상처를 주고받았던 것을 그룹 멤버와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바로 대화에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성도 간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 수가 없었던 성도들이 자신의 지난 역사를 말하기 시작했고 저 또한 저의 인생 역정을 숨김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사람과 사람사이가 가까워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아주 오랜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으로 홈페이지를 선택했고 저는 그것을 총대를 메겠다는 비유로 해서 적극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잘난 척을, 가끔은 바람에 대한 것을 적극적으로, 이런 저런 다른 문장을 통해 댓글을 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글을 올리라고 하던지 하소연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의 부족한 표현으로 어떤 이는 작은 시험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저의 교만에 기도로서 응원해 주신 분도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솔직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쓸 때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합니다. 전자의 허구를 쓰고자 할 때에는 창조한 것을 포장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지만 후자의 논픽션은 절대로 꾸미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면 신앙의 공간에 내 신앙의 척도를 그대로 보인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어느 날부터 저희 교회의 홈페이지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조회 수에 비해 댓글과 올려진 글이 없는 것에 대한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결론을 신앙이란 것을 서로 간 다르게 이해하는 데 있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목적으로 하는 것은 하나인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지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서로 간 사랑이 없고 성도 간 교제에 어색함에서 온다는 객관적인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저희 교회 뿐만 아니라 현 시대의 모든 교회 즉 건물이라는 외형적인 교회를 다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한 교회를 섬길 때에는 가족처럼 형제처럼 대하다가 그가 교회를 옮기면 이상한 분위기로 서로 변모(變貌)하는 모습이 참 싫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도와 밥 먹으면 성도 간의 참교제이지만 내가 싫어하는 성도들이 식사를 하면 붕당(朋黨)을 짓는 무리로 보는 시각을 없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오해와 불신과 시기와 질투는 서로 간 신앙생활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이해였으며 하나님과 우리와 우리와 다른 우리와의 사랑을 이간질하는 사단마귀의 훼방으로 보았기에 우리는 서로 간 함께 제대로 배워서 서로 실천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이럴 때에 사랑의 40일 캠페인은 그 시기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고 봅니다.
아마도 목사님을 비롯한 중직 분들의 기도의 결실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린 이제부터 그것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목자수련회를 통해 우린 손을 잡고 웃을 수 있었고 서로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서로 웃고 있었지만 목사님을 비록한 모든 중직들의 눈과 마음은 새로운 시작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여태껏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시험을 주기도 하고 상처를 준 것을 크게 반성하고 또 반성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깨우침을 비롯한 우리들의 미래를 열 수 있는 발판을 주었던 것입니다.
캠페인의 소책자 하단에 보면 ‘우리는 관계를 위해 지음 받았다.’ 라고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우린 서로 웃고 또 울면서 그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교회의 중직들부터 지금보다 더 낮아지고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여서 아직 교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성도들을 따뜻하게 감싸 정착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이제 갓 등록한 성도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그 사랑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소책자 뒤쪽에 있는 ‘당신의 인생 최고의 목표는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을 우리를 통해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알게 돼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다!’ 에서 그 학교가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간의 참된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배웠습니다.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라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나 강도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나 집사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직분만을 가진 것을 상으로 생각하고 사랑은 너나 하는 것이라고 뒷짐 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예쁘게 보지 않는 다는 것을 제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마지막 우리에게 당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를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에 쇠를 달궈 몸에 지지듯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당신의 말이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서 그로 인해 교회의 분위기가 더욱 좋아지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를
‘당신의 말과 글이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잔잔한 물결을 일으켜서 그로 인해 교회의 분위기가 더욱 좋아지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로 단 두 음을 첨가해서 앞으로 한 단계 높고 깊게 실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짐을 가지시렵니까?
아직도 어렵게 게시판에 올려진 이런 글들이 저만의 교만이고 자랑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마도 제 맘에 그런 맘이 자리하고 있다면 저는 구태여 이런 공간에 애써 눈과 어깨가 아픈 것을 참아가며 올리지 않습니다.
저는 좋지 않은 몸으로 참석했던 어제 예배에서 또 하나를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손과 발과 온 몸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그런 십자가의 고통을 지고 또 이해하라는 음성. 그것을 들었습니다.
바로 위의 글에서 말과 글은 제 자신이기 전에 여러분의 반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령 저나 저 성도가 제 자랑을 올리기 위해 글을 올리더라도 반응을 보여서 자신감을 갖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옆길로 새지 말기를 기도로 막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이 6주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모양새라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글 :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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